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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국제공항 어느 창문 앞
이제 한국 땅을 벗어나는구나. 어떤 경험을 마주할까. 돌아오면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 달리(고양이)는 괜찮을까. 미국까지 갔는데 프로젝트가 망하면 어떡하지.
2024년 9월 20일. 눈오는 겨울 새벽 밤 계획에 없던 외출을 할 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나는 공항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함께 출발하는 글로벌 부트스트랩 팀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스타트업처럼 일하기
우리 회사는 AI 음성 합성(TTS, Text-to-Speech) 기반 콘텐츠 제작 도구를 개발한다. 더빙, 영상 편집, 목소리 복제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핵심은 AI TTS 에디터다. 이 에디터는 국내 크리에이터들에게 이미 호평을 받았지만, 해외 시장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정말 다르게 해봐야 해요."
처음 출장을 논의할 때 대표가 했던 말이다. 우리 제품은 이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했고, 기존 TTS 에디터는 사용성에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지 접근 방식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감을 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미국 캘리포니아 San Mateo에 있는 미국 지사로 향했다. 목표는 단순했다. 마치 초기 스타트업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실제 영어권 사용자 피드백을 바탕으로 제품을 개선하는 것. 그렇게 총 6명으로 된 글로벌 부트스트랩 팀이 만들어졌다(한국: 개발자 3명 + 디자이너 1명, 현지: 대표 + PM).
Concar 400 Dr에 있는 WeWork 오피스
"한국에서 수백 번 회의하기보다, 현지에서 직접 사용자를 만나는 30분이 더 가치 있다."
첫날 미팅에서 나온 이 말은 남은 여정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데일리 프로토타입과 인터뷰 사이클
우리는 3주 동안 16번 프로토타입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사용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일정은 대략 이런 흐름이었다:
- 오전: 사용자 인터뷰 진행
- 오후: 인터뷰 결과 분석 및 토론 (평균 2~3시간)
- 저녁~밤: 다음 날 인터뷰를 위한 프로토타입 개발
- 다음 날 아침: 마지막 테스트 및 디버깅 후 다시 인터뷰
마치 정밀한 기계처럼 돌아가는 이 사이클이 처음에는 버거웠다. 개발자인 나는 코드를 깔끔하게 작성하고 싶었고, 버그 없이 완벽한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동료가 해준 말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완벽한 코드보다 사용자 반응을 빨리 보는게 중요해요. 무엇이 시장에서 성공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스피드가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내 이 방식이 얼마나 강력한지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는 2~3일에 한 번씩 실제 사용자에 대한 반응을 볼 수 있었고, 그 때마다 제품은 시장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프로토타입 중 일부
특히 사용자가 프로토타입을 사용하다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순간이 기억에 남았다. 개발자인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UX 패턴이 사용자에겐 전혀 직관적이지 않았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서 "공급자 관점"과 "사용자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인사이트: 시장에서 선택받기 위한 조건
1. 사용자와 거리를 좁혀야 한다
미국 출장에서 얻은 가장 큰 인사이트는 "공급자 생각"과 "사용자(시장)가 원하는 것" 사이 간극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TTS 에디터에 음성, 캐릭터, 배경 등 다양한 편집 기능을 담았었는데, 이는 "더 많은 기능"이 "더 좋은 제품"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대다수 사용자들은 텍스트를 잘 편집할 수 있고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 음성이 "잘" 흘러나오면 충분히 만족했다.
"왜 이 기능이 필요한가요?" "제가 원하는 기능을 찾을 수 없어요."
이 질문은 마치 우리가 만든 프로덕트가 쓸모없고,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방향이 달랐을 뿐이다. 사용자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불필요한 복잡성을 제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왜(Why)"라는 질문은 기획, 디자인, 개발 모든 단계에서 가장 중요하다.
매일같이 사용자를 만났고, 회의에서는 이 "왜"에 집중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왜 다른 버튼을 찾았는지. 이런 질문들이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이 되었다. 모두 머리 속 상상이 아닌, 실제 사용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2. 의사결정 구조: 대표는 실무와 가깝게
지금 근무중인 회사는 한국과 미국 지사가 있고, 대표는 미국 지사에서 글로벌 대상으로 세일즈, 미팅, 인터뷰 등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던 나는 출장 전 '대표와 함께 있으면 일할 때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오산이었다. 현장에서 경험해보니 여러 이점이 있었다:
- 의사결정 속도: "이 기능 넣어볼까요?"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상호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 컨텍스트 공유: 대표와 함께 직접 사용자 반응을 보면서, 모두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 방향성 정렬: 대표가 생각하는 비전과 팀이 관찰한 결과가 자연스럽게 조율된다.
"이거 정말 좋은데요! 다음 버전에서는 이렇게 해봅시다."
대표가 직접 테스트하고 즉석에서 피드백을 주는 모습은 마치 초기 스타트업에서 창업자가 제품을 손수 다듬는 모습과 같았다. 빠르고, 즉각적이었으며, 결정에 힘이 실렸다.
회사가 커지더라도 의사결정권자는 현장과 멀어지면 안 된다.
이번 경험은 회사 규모와 관계없이, 핵심 결정권자가 사용자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특히 글로벌과 경쟁하며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구조가 훨씬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3. 빠른 검증 사이클: 논의보다 프로토타입
출장 전에는 기획과 디자인을 꼼꼼히 검토하며 많은 논의를 거친 후에야 개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거의 반대로 일했다.
"이게 좋을 것 같아요. 일단 가장 빠르고 쉽게 만들어 보고 반응을 지켜봅시다."
긴 논의로 모든 상황을 예측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실제 사용자 반응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이런 접근 방식은 처음에는 무모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놀라울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순서가 뒤로 이동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 간략한 아이디어 미팅 (30분~1시간)
- 프로토타입 개발 (3~4시간)
- 사용자 테스트
- 결과를 바탕으로 한 심층 논의 (2~3시간)
이러한 방식이 갖는 장점은 실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논의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 버튼을 여기에 놓으면 어떨까요?"라는 추상적인 질문 대신, "어제 인터뷰를 진행했던 사용자 중 n%가 이 버튼을 찾지 못했습니다"라는 구체적인 사실과 숫자를 바탕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
불확실성이 높을수록 빠른 검증이 중요하다.
특히 새로운 시장이나 기능을 개발할 때는 아무리 경험 많은 전문가라도 모두 예측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빠르게 만들고 검증하는 사이클이 훨씬 효과적이다.
개인적인 성장
Apple Park 뒤로 보이는 해밀턴 산
스스로도 많은 성장을 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학습하고 적용하는 방법, 팀원들과 효율적으로 소통하는 방법, 그리고 무엇보다 사용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다.
기술 학습
새로운 기술을 접할 때 가장 효과적이었던 방법은 다음과 같다:
- 공식 문서나 신뢰할 수 있는 예제 코드를 먼저 살펴본다
- 핵심 개념이나 패턴을 파악한다
- 실제 필요한 부분에 바로 적용해본다
- 문제가 발생하면 다시 문서로 돌아가 깊이 있게 이해한다
이 과정을 반복해 Slate.js도 짧은 시간 내에 파악해 프로토타입에 적용할 수 있었다.
효율적인 소통 방식
빠른 개발 사이클에서 발견한 효과적인 소통 방식은 다음과 같다:
- 짧고 명확한 미팅 (5~10분)
- 논의 사항을 미리 정리
- 결과와 다음 할 일을 문서화
특히 컨텍스트 스위칭이 많은 상황에서는 짧게 자주 소통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다.
돌아온 후
출장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우리 팀이 일하는 방식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 프로토타입 중심 개발: 긴 논의보다는 빠른 검증과 실제 데이터를 우선한다
- 사용자 중심 사고: 모든 기능에 "왜?"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또한 출장 중 개발한 프로토타입이 실제 제품 로드맵에 반영되어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큰 성취감을 주었다.
마치며
떠나는 길 비행기 안에서
'그래, 다녀오면 무언가 얻어오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배움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교휸은 "사용자(시장)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뛰어난 개발자도 상상 속에서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없다. 그렇게 시장에서 검증되면 그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자주 검증"해야 한다. 글로벌 시장 진출도 필수적이다.
이 접근 방식은 실제 성과로 이어졌다. 프로토타입 기반 제품 릴리스 후 1주일 만에 이런 성과를 얻었다:
- 총 사용자 수 51.2% 증가 (4,535명 -> 6,859명)
- 신규 참여 사용자 46.3% 증가 (2,508명 -> 3,668명)
- 신규 사용자에 대한 가입 전환율 71.4% 향상 (18.9% -> 32.4%)
- 활성 로그인 사용자 수 136.9% 증가 (549명 -> 1,301명)
- 사용자 활성 비율 57.0% 증가 (12.1% -> 19.0%)
이는 우리가 선택한 방향이 시장에서 어느정도 검증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영어권에서 높은 반응을 보여 글로벌 시장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제품을 위한 도전을 계속하고 싶다. 다음에 이런 기회가 한번 더 생긴다면 이번에 배웠던 내용을 바탕으로 더 큰 성과를 내보고 싶다.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create it." - Abraham Lincoln
우리가 만드는 제품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작은 조각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